히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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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샴 1세는 788년에 즉위하여 796년 사망한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이다. 그는 아브드 알라흐만 1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형제들과의 경쟁을 거쳐 아미르가 되었다. 통치 기간 동안 북방의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상대로 원정을 벌이고, 셉티마니아와 아스투리아스를 공격했다. 또한 과달키비르 강의 석교를 수리하고 메스키타에 미나렛을 설립하는 등 건축 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정의로운 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검소한 생활과 이슬람식 생활 방식을 확립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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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6년 사망 - 오파 (머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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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하캄 1세는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코르도바를 통치한 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였으며, 삼촌들의 반란과 여러 도시의 반란을 진압하고 귀족들을 학살하는 등 강압적인 통치를 하다가 822년에 사망했다. - 코르도바 아미르 - 아브드 알라흐만 1세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756년 이베리아 반도에 후우마이야 왕조를 건국하고 아바스 왕조의 침략과 반란을 진압하며 코르도바 대사원을 건설하는 등 알 안달루스에 우마이야 왕조를 재건한 인물이다.
히샴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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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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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코르도바의 아미르 |
통치 기간 | 788년 10월 6일 - 796년 4월 16일 |
즉위식 | 해당사항 없음 |
선임자 | 아브드 알-라흐만 1세 |
후임자 | 알-하캄 1세 |
왕조 | 우마이야 왕조 |
종교 | 이슬람 |
개인 정보 | |
출생일 | 757년 4월 26일 |
출생지 | 코르도바 |
사망일 | 796년 4월 16일 |
사망지 | 코르도바 |
아버지 | 아브드 알-라흐만 1세 |
어머니 | 할룰 |
배우자 | 정보 없음 |
자녀 | 알-하캄 1세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Hisham I Al-Reda |
2. 즉위 이전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만년에 아들 히샴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메리다의 대관으로 임명했다.
2. 1. 후계자 지명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만년에 11명의 아들 중에서 히샴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변방 구역인 메리다의 대관으로 임명했다. 이때, 히샴과 아미르의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는 형 슬라이만은 같은 변방 구역의 톨레도 대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븐 이자리의 『바얀』에 따르면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덕과 자제심을 갖추고 일반적으로 지지가 많은 히샴"과 "연장자이며 용감하고 샤미윤(전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아마지그인의 반란 진압을 위해 시리아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파견된 아랍인. 그들은 영지를 받고 군무에 복무했다[9])의 지지를 받고 있는 슬라이만" 중에서 자신이 죽은 후에 먼저 수도 코르도바에 달려온 쪽을 최종적인 아미르로 하겠다고 유언했다고 한다. 788년에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죽자 히샴은 형 슬라이만보다 먼저 코르도바에 달려가 아미르로 즉위했다.2. 2. 형제들과의 경쟁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만년에 11명의 아들 중에서 히샴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변방 구역인 메리다의 대관으로 임명했다. 이때, 후에 히샴과 아미르의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는 형 슬라이만은 같은 변방 구역의 톨레도 대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븐 이자리의 『바얀』에 따르면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덕과 자제심을 갖추고 일반적으로 지지가 많은 히샴"과 "연장자이며 용감하고 샤미윤(전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아마지그인의 반란 진압을 위해 시리아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파견된 아랍인. 그들은 영지를 받고 군무에 복무했다[9])의 지지를 받고 있는 슬라이만" 중에서 자신이 죽은 후에 먼저 수도 코르도바에 달려온 쪽을 최종적인 아미르로 하겠다고 유언했다고 한다. 788년에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죽자 히샴은 형 슬라이만보다 먼저 코르도바에 달려가 아미르로 즉위했다.히샴 1세의 즉위에 불복한 형 슬라이만은 톨레도와 그 근교의 아랍인과 아마지그인의 군대를 이끌고 코르도바로 향했지만 도중에 하엔 근교에서 패배했다. 그는 형제 압둘라와 합류하여 톨레도에 웅거하며 히샴 1세에 저항했다. 슬라이만은 압둘라에게 톨레도를 맡기고 메리다에 지원을 요청하러 갔지만 거절당하고 전투에서 패배하여 무르시아로 도망쳤다. 이를 들은 압둘라는 히샴 1세에게 톨레도를 항복시키고 마그레브로 망명했다. 슬라이만은 발렌시아로 쫓겨나 790년에 항복하고 마그레브로 망명했다. 이후 히샴 1세의 왕자 하캄(후의 하캄 1세)이 즉위할 때까지 톨레도 대관을 맡았다.
3. 아미르 즉위와 반란 진압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11명의 아들 중 히샴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메리다의 대관으로 임명했다. 788년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죽자 히샴은 형 슬라이만보다 먼저 코르도바에 도착하여 아미르로 즉위했다.[9]
히샴 1세의 통치 초기인 788년, 그의 형제인 술레이만과 압드 알라가 반란을 일으켰다.[4] 술레이만은 톨레도와 그 근교의 아랍인과 아마지그인의 군대를 이끌고 코르도바로 향했지만, 하엔 근교에서 패배했다. 이후 790년에 항복하고 마그레브로 망명했다.
3. 1. 즉위 과정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던 중, 11명의 아들 중에서 히샴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메리다의 대관으로 임명했다. 이때, 히샴과 아미르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는 형 슬라이만은 톨레도 대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븐 이자리의 『바얀』에 따르면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덕과 자제심을 갖추고 일반적으로 지지가 많은 히샴"과 "연장자이며 용감하고 샤미윤(전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아마지그인의 반란 진압을 위해 시리아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파견된 아랍인. 그들은 영지를 받고 군무에 복무했다[9])의 지지를 받고 있는 슬라이만" 중에서 자신이 죽은 후에 먼저 수도 코르도바에 달려온 쪽을 아미르로 하겠다고 유언했다. 788년에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죽자 히샴은 형 슬라이만보다 먼저 코르도바에 달려가 아미르로 즉위했다.3. 2. 형제들의 반란
히샴 1세의 통치 초기인 788년, 그의 형제인 술레이만과 압드 알라가 반란을 일으켰다.[4]
히샴 1세의 즉위에 불복한 형 술레이만은 톨레도와 그 근교의 아랍인과 아마지그인의 군대를 이끌고 코르도바로 향했지만, 도중에 하엔 근교에서 패배했다. 술레이만은 형제 압둘라와 합류하여 톨레도에 웅거하며 저항했다. 이후 술레이만은 압둘라에게 톨레도를 맡기고 메리다에 지원을 요청하러 갔지만 거절당하고 전투에서 패배하여 무르시아로 도망쳤다. 이를 들은 압둘라는 히샴 1세에게 톨레도를 항복시키고 마그레브로 망명했다. 술레이만은 발렌시아로 쫓겨나 790년에 항복하고 마그레브로 망명했다. 이후 히샴 1세의 아들 하캄(후의 하캄 1세)이 즉위할 때까지 톨레도 대관을 맡았다.
3. 3. 반란 진압 이후
히샴 1세의 즉위에 불복한 형 슬라이만은 톨레도와 그 근교의 아랍인과 아마지그인의 군대를 이끌고 코르도바로 향했지만, 도중에 하엔 근교에서 패배했다. 슬라이만은 형제 압둘라와 합류하여 톨레도에 웅거하며 히샴 1세에 저항했다. 슬라이만은 압둘라에게 톨레도를 맡기고 메리다에 지원을 요청하러 갔지만 거절당하고 전투에서 패배하여 무르시아로 도망쳤다. 이를 들은 압둘라는 히샴 1세에게 톨레도를 항복시키고 마그레브로 망명했다. 슬라이만은 발렌시아로 쫓겨나 790년에 항복하고 마그레브로 망명했다. 이후 히샴 1세의 왕자 하캄(후의 하캄 1세)이 즉위할 때까지 톨레도 대관을 맡았다.4. 통치
히샴 1세는 국내를 평정한 후, 북쪽의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상대로 사이파(봄~여름에 걸친 원정으로, 변경 지역에 대한 시위 목적도 있었다[7])를 시작했으며, 이는 이후 아미르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이 원정을 위해 이스틴파르라는 병력 동원령을 내려 아랍 정규군뿐만 아니라 하슈드라고 불리는 지원병도 전리품 분배를 대가로 모집했다[7]。 지방 반란 세력(유력자)에 대해서는 힘으로 제압하지 않고, 이들을 서로 대립시켜 충성스러운 자에게 지방 통치를 맡기는 정책을 펼쳤다.
군사적인 면 외에도, 히샴 1세는 779년에 발생한 홍수로 파괴된 과달키비르 강의 석교(알 칸타라)를 수리했다[7]。 또한 메스키타에 미나렛을 세웠으나 현재는 토대 부분만 남아있다[10][11]
4. 1. 국내 정책
그는 국내를 평정한 후, 북방의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상대로 사이파(봄~여름의 원정. 변경에 대한 시위 목적도 있었다[7])를 시작했고, 이후 이는 아미르의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스틴파르라는 병력 동원령에 의해 아랍의 정규병뿐만 아니라 하슈드라고 불리는 지원병도 전리품 분배를 보수로 모집되었다[7]。한편 지방의 반란 분자(유력자)에 대해서는,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유력자들을 대립하게 하여, 더욱 충실한 자에게 지방을 맡기는 정책을 취했다.군사면 외에도, 그는 779년에 발생한 홍수로 파괴된 과달키비르 강의 석교(알 칸타라)를 수리하게 했다[7]。
또한, 메스키타에 미나렛을 설립했지만 현재는 토대 부분만 남아있다[10][11]
4. 2. 대외 원정
오르비유 강 전투히샴 1세는 셉티마니아 서부 및 동부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진출하는 카롤링거 왕조에 맞서 793년 기독교 프랑크족에 대항하는 ''지하드''를 선포했다. 지로나와 나르본으로 군대를 파견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 원정을 통해 코르도바 대사원[5] 확장과 많은 모스크 건설 자금으로 사용된 막대한 전리품과 노예를 획득하였다.
794년부터 히샴 1세의 장군들은 매년 북부 알라바, 옛 카스티야, 아스투리아스를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는 도주했고, 샤를마뉴와 접촉을 시작했다. 이러한 원정의 주된 목적은 약탈이었으며, 안달루시아 수비대, 아스투리아스 왕국, 바스크족에 대한 코르도바 군사력의 우위를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스틴파르라는 병력 동원령으로 정규병뿐만 아니라 하슈드라고 불리는 지원병도 모집했다.[7]
히샴 1세는 지방의 반란 세력(유력자)에 대해서는 힘으로 제압하는 대신 지방 유력자들을 대립시켜 충성스러운 자에게 지방을 맡기는 정책을 취했다.
군사면 외에도, 779년에 발생한 홍수로 파괴된 과달키비르 강의 석교(알 칸타라)를 수리하게 했다.[7] 또한, 메스키타에 미나렛을 설립했지만 현재는 토대 부분만 남아있다.[10][11]
4. 2. 1. 셉티마니아 원정
793년 히샴 1세는 기독교 프랑크족에 대항하는 '지하드'를 선포하고, 지로나와 나르본으로 군대를 파견했지만, 이 요새들은 굳건히 버텼다.[5]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 압드 알-말리크 이븐 압드 알-와히드 이븐 무기스는 카르카손으로 접근하여 경건왕 루이의 멘토인 윌리엄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원정은 카롤링거 영토 깊숙이 진격하지 않았고, 막대한 전리품과 수많은 노예를 얻는 것으로 끝났는데, 이는 코르도바 대사원을 확장하고 많은 모스크를 건설하는 자금으로 사용되었다.[5]4. 2. 2. 아스투리아스 왕국 원정
히샴 1세는 국내를 평정한 후, 북방의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상대로 사이파(ṣā'ifa, 봄~여름 원정. 변경에 대한 시위 목적도 있었다)를 시작했고, 이는 이후 아미르의 중요한 일이 되었다.[7] 794년부터 그의 장군들인 압드 알-말리크와 그의 형제 압드 알-카림 이븐 압드 알-와히드 이븐 무기스는 히샴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매년 북부 공국들, 즉 알라바, 옛 카스티야, 아스투리아스를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 오비에도 (794년) 깊숙이 진격하여 약탈했다.[7]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는 도주했고, 샤를마뉴와 접촉을 시작했다.이러한 원정은 북부 기독교 공국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전리품을 모으고, 불안정한 지역 안달루시아 수비대와 분리되기 쉬운 영주들, 아스투리아스 왕국, 그리고 바스크족에 대한 코르도바 군사력의 우위를 재확인하기 위한 약탈 목적의 습격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이스틴파르(istinfār)라는 병력 동원령에 의해 아랍의 정규병뿐만 아니라 하슈드(ḥashad)라고 불리는 지원병도 전리품 분배를 보수로 모집되었다.
4. 3. 건축 사업
히샴 1세는 군사적인 면 외에도 779년에 발생한 홍수로 파괴된 과달키비르 강의 석교(알 칸타라)를 수리했다.[7] 그는 메스키타에 미나렛을 설립했지만, 현재는 토대 부분만 남아있다.[10][11]히샴 1세가 석교를 수리할 때, 오락으로 사냥을 가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원정 목적 외에는 석교를 건너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7]
5. 죽음과 유산
히샴 1세는 796년, 40세의 나이로 8년간의 통치를 끝으로 사망했다.[6] 그는 우마르 2세를 본받아 단순하게 생활하고 과시를 피하면서 이슬람식 생활 방식을 확립하려 노력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공정한 정의와 건전한 행정으로 알려졌다. 그의 사후, '압드 알라(Abd Allah)'는 망명에서 돌아와 발렌시아를 요구했고, 술레이만(Suleiman)은 히샴의 아들 알-하akam 1세를 상대로 탕헤르를 요구했다.[6]
히샴은 의로움의 모범이자 충성스러운 왕자였다. 그는 구원을 희망하며 살았고, 왕위에 오른 시점에 자신의 점성술에 근거하여 단 8년밖에 살 수 없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자선 활동을 통해 구원을 구했다. 그는 가장 단순한 옷을 입었고, 코르도바의 길을 혼자 걸어 다니며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병든 사람들을 방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의 모든 필요, 요청, 불만에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밤에는 폭우 속에서도 궁궐에서 음식을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는 종교적 의무에 충실했고, 백성들에게 그의 모범을 따르도록 권고했으며, 비 오는 밤에는 모스크에서 야간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8년 후, 히샴은 예측대로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후계자에게 존경받는 왕국을 남겼다.
6. 평가
히샴 1세는 8년간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우마르 2세를 본받아 이슬람식 생활 방식을 확립하고, 공정하고 검소한 통치로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는 "정의로운 자"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의로움을 실천했으며, 자선 활동과 종교적 의무에 충실한 모범적인 통치자였다.[6]
6. 1. 긍정적 평가
히샴 1세는 796년, 40세의 나이로 8년간의 통치를 끝으로 사망했다.[6] 그는 우마르 2세의 전형이었으며, 검소한 생활과 과시를 피하는 이슬람식 생활 방식을 확립하려 노력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공정한 정의와 건전한 행정으로 알려졌다. 그의 사후, '압드 알라(Abd Allah)'는 망명에서 돌아와 발렌시아를 요구했고, 술레이만(Suleiman)은 히샴의 아들 알-하akam 1세를 상대로 탕헤르를 요구했다.[6]히샴은 "정의로운 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히샴은 의로움의 모범이자 충성스러운 왕자였다. 그는 구원을 희망하며 살았고, 왕위에 오른 시점에 자신의 점성술에 근거하여 단 8년밖에 살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이 때문에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자선 활동을 통해 구원을 구했다. 그는 가장 단순한 옷을 입었고, 코르도바의 길을 혼자 걸어 다니며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병든 사람들을 방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의 모든 필요, 요청, 불만에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밤에는 폭우 속에서도 궁궐에서 음식을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는 종교적 의무에 충실했고, 백성들에게 그의 모범을 따르도록 권고했으며, 비 오는 밤에는 모스크에서 야간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8년 후, 히샴은 예측된 대로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후계자에게 존경받는 왕국을 남겼다.
7. 일화
히샴 1세는 796년, 40세의 나이로 8년간의 통치를 끝으로 사망했다.[6] 그는 우마르 2세를 본받아 소박하게 생활하고 과시를 피했으며, 이슬람식 생활 방식을 확립하려 노력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공정한 정의와 건전한 행정으로 알려졌다. 그의 죽음 이후, '압드 알라(Abd Allah)'는 망명에서 돌아와 발렌시아를 요구했고, 술레이만(Suleiman)은 히샴의 아들 알-하akam 1세를 상대로 탕헤르를 요구했다.[6]
히샴은 "정의로운 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구원을 희망하며 살았고, 왕위에 오른 시점에 자신의 점성술에 근거하여 단 8년밖에 살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이 때문에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자선 활동을 통해 구원을 구했다. 그는 가장 단순한 옷을 입었고, 코르도바의 길을 혼자 걸어 다니며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병든 사람들을 방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의 모든 필요, 요청, 불만에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밤에는 폭우 속에서도 궁궐에서 음식을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는 종교적 의무에 충실했고, 백성들에게 그의 모범을 따르도록 권고했으며, 비 오는 밤에는 모스크에서 야간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8년이 지난 후, 히샴은 예측된 대로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후계자에게 존경받는 왕국을 남겼다.
- 히샴 1세가 석교를 수리했을 때, 오락으로 사냥을 가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원정 목적 외에는 석교를 건너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일화가 있다.[7]
- Ch-E. 듀프르크에 따르면, 히샴 1세는 안달루스에서 라틴어로 말하거나 쓰는 것을 금지했지만, 실제로 안달루스에서 라틴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12]
참조
[1]
서적
Al-Bayan al-Mughrib
[2]
서적
Al-Bayan al-Mughrib
[3]
서적
Caliphs and Kings: Spain 796-1031
Blackwell Publishing
[4]
서적
Caliphs and Kings: Spain 796-1031
[5]
간행물
Hisham I
E.J. Brill
[6]
서적
Caliphs and Kings: Spain 796-1031
[7]
서적
アラブとしてのスペイン
第三書館
1992-07-01
[8]
서적
世界史年表・地図
吉川弘文館
1995-04-01
[9]
서적
イスラーム・スペイン史
岩波書店
1976-04-26
[10]
서적
季刊文化遺産vol.19「アンダルシアの光と影」
島根県並河萬里写真財団
2005-04-01
[11]
서적
アラビア文化の遺産
みすず書房
1982-01-12
[12]
서적
イスラーム治下のヨーロッパ-衝突と共存の歴史
藤原書店
199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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